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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

< 크롬웰과 왕정복고 >

by mathilda72 2023.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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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7세기의 정치적 상황

 

- 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6세였고 영국에서는 제임스 1세였던 왕이 1603년 시작한 스튜어트 왕조의 시기에 17세기 문학도 새로운 형태로 변화를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시기는 엘리자베스 1세와는 달리, 시민으로 구성된 의회의 특수한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며 대립적인 구도를 취하였고 이는 후대 왕인 찰스 1세에 더 커다란 대립으로 악화되어 왕이 참수되는 사태가 벌어지는 정치적으로 불안한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 당시 영국 의회의 하원을 포석하고 있었던 청교도들은 찰스 1세에게 대항하며, 왕당파와 1642년부터 1649년까지 내전, '청교도혁명'을 일으켜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하게 된다. 그리고 이 중심에 크롬웰이 있었다.

 

- 16세기에서 17세기에 활동한 개신교도들인 청교도(Puritan)는 자신들이 아닌, 이들의 극단으로 교리를 완벽하게 추구한다는 일종의 빈정대는 말에서 비롯된 것인데, 루터파와 칼뱅파 계열 그리고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에 소속된 이들을 비롯하여 계열을 추구하지 않던 이들도 포함되어진 다양한 전통 복음주의를 추구한 사람들이다.

 

- 하지만 스튜어트 왕조 때 제임스 1세를 비롯하여 찰스 1세 때에 청교도는 영국 교회의 신조를 따르지 않고 감독 제도에 반대한 개신교 집단으로 낙인이 찍혀 박해를 피하고자 이들 중의 일부인 102명이 1620년에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타고 종교의 자유를 찾기 위해 미국 플리머스에 식민지를 개척한다. 또한 스튜어트 왕조에 대해 정치적인 요구와 관련하여 청교도들의 입지는 더욱 강하여 진다.

 

 

<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 >

1. 제임스 1세(1566~1625) -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혼인하지 않고 후계자 없이사망하자, 혈통적으로 보았을 때 잉글랜드의 왕위계승권의 자격이 있었던 제임스 6세이자 동시에 제임스 1세인 스코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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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 1599~1658)

 

- 영국 내전(English Civil Wars)이자 청교도혁명(Puritan Revolution)이라고 불리는 역사적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크롬웰은 군인, 정치가로서 활동하였던 인물이고, 공화정을 건립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 크롬웰의 정치적인 활약에 대한 기반은 자신의 청교도적인 종교 신념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철저한 청교도인 이었던 그는 가톨릭을 신봉하는 유럽 국가들이 개신교도들을 박해하는 등의 사건에 대해 강한 비난을 하였는데, 찰스 1세가 통치하던 시기에 왕이 영국 국교회를 친 가톨릭적으로 개혁하는 상황을 열렬히 반대하였다. 여기에 왕의 여러 정책이 실패로 돌아갔고, 의회를 외면하며 독야청청 하고 있는 왕에 대하여 비난을 하는 청교도 하원의원들과의 교류를 넓혀 나가게 되고 마침내, 1649년 찰스 1세를 처형하면서 공화국(Commonwealth of England)을 세웠다.

 

- 크롬웰은 공화국에서 국무회의 의장이 되어 1651년 크롬웰은 네덜란드 중계 무역상들을 제한하는 항해조례(Navigation Acts)를 제정하여 네덜란드와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군인 출신이었던 크롬웰은 군대 내에서 의회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자, 의회를 해산하고 1653년에 영국 최초의 성문화된 헌법인 통치장전(Instrument of Government)을 제정하여 12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 세 나라를 통치하는 호국경(Lord Protector)의 자리에 오르게 되어 호국경(Protectorate) 정치를 시작한다.

 

- 호국경이 된 크롬웰은 의회를 소집하는 것과 해산하는 일을 반복하다가 1658년 결국 의회는 해산하게 되었고, 이 시기에 법률을 개혁하고 교육을 진흥하는 등의 사회적인 개혁을 추진하게 되며, 유대인들의 입국을 허용하였고 중등교육을 육성하고자 라틴어를 교육하는 등의 일을 시작하지만, 왕당파가 1655년에 반란을 일으키자, 군정(軍政)을 강화하게 된다.

 

- 1658년 말라리아로 사망하게 된 크롬웰에 대해, 영국이 청교도 혁명 이후 정치적인 혼란기였고, 이를 그가 안정적으로 회복하여, 영국 역사상 의회가 국정을 운영하게 되는 공화정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점과, 입헌주의 국가로 발전할 수 있도록, 성문 헌법인 통치 장전을 제정한 것은 영국의 발전에 기여를 하였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 그러나 공화주의적인 요구를 억압하고, 의회를 해산하여 호국경의 위치에 오르게 되어 공화국의 입지가 약해지는 계기가 되어 다시 왕이 정치를 하게 되는, ‘왕정복고의 시대로 회귀에 대해 원인을 제공하였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 크롬웰의 사후에 아들인 리처드 크롬웰(Richard Cromwell, 1626~1712)이 호국경이 되었으나, 1660년에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부친의 처형을 당한 이후에 10년간의 망명 생활 끝에 돌아와 영국은 다시 왕이 통치를 하게 된다.

 

- 크롬웰의 시신은 1661년 발굴되어 찰스 1세가 처형된 같은 날짜에, 이른바 크롬웰에 대한 사후 처형 의식(조선왕조때 연산군이 이미 사망하였던 한명회를 비롯한 사람들에게 행하였던 '부관참시' 와 비슷한 극형) 이 치러지는데, 이때 그의 시신은 교수형을 당하고, 바닥에 끌렸으며 온 사지는 찢어진 끝에 구덩이에 던져지게 된다. 또한 잘린 그의 머리는 1685년까지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기둥에 전시되었다가 1960년 캠브리지 대학교 바닥에 묻히게 되었다고 전하여진다.

 

3. 찰스 2세(Charles II, 1630~1685)

 

- 1660년 찰스 2세는 왕의 자격으로 영국에 돌아왔고, 시민들은 나라의 안정과 안전한 질서유지를 간절히 바라면서 찰스 2세를 환호하였다. 부친인 찰스 1세의 융통성 없이 일방적인 완고함 때문에 생긴 비극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았던 찰스 2세는 정치적인 시련을 통하여 단련되었으며, 상황 판단이 빨랐고 정치적으로는 유연하게 정책을 펼쳐서 비극적인 자신의 과거에 집착하기보다는 오히려 타협과 공존을 통하여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하고자 했던 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 또한 청교도 혁명 이후에 정체되었던 과학과 지식 등의 문화 전반에 걸친 분야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지만 개인적인 쾌락과 욕망을 추구하였던 인물인, 찰스 2세는 도덕적 자질이 부족하였으며, 강력한 통치자로서 영국의 군주로 평가받기에는 무리가 있는 왕으로 평가 되어 진다.

 

영국으로 돌아오는 찰스 2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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